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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힡천] 떠나기 전에

신도림

by myeolsi 2020. 8. 6.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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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곳에서 매일 사선을 넘으며 싸우다 보면,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

상념에 잠겨 비돌을 내려다보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다. 진통제를 맞고도 욱신거리는 눈알을 느릿하게 굴렸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자리를 지키던 히터가 제 오른쪽 측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고개를 돌려도 좇아온 눈이 깜빡댔다. 붕대 위에 못박힌 눈을 떼어내는 데 시간이 걸린 히터는 뜸을 들이다 손을 올려 제 왼 눈을 톡 쳤다.

"안대. 드릴까요."

입을 작게 벌린 채 이번엔 저가 히터의 왼 눈을 쳐다봤다. 안대. 이젠 옷으로 가리지 못하는 상처가 생겼다. 막힌 시야가 답답했다. 다 아물고도 보이지 않겠지 싶었다. 그러나 큰 동요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현상금 사냥꾼 짓을 하며 몸이 상하는 것 정도는 예상 안이었지만 이렇게 침착할 줄은 몰랐다. 지옥에서 이쯤 살면 익숙해지는 걸까. 자조적인 웃음이라도 지어보려는데 미약하게 떨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근육이 지쳐 있었다. 깨닫자 변덕처럼 입꼬리가 올라간다. 저가, 저가 무얼 했다고. 잃기만 한 숲에서 한 게 뭐가 있다고 힘이 들지? 초점을 놓고 실실대다 문득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눈을 바닥에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됐어.”
“그런가요.”

단조로운 말투로 히터가 답했다. 몸을 돌려 비돌을 내려다본다. 정장 코트의 팔이 우아하게 펄럭였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럴 거라 생각은 안 합니다만,”

잘 정돈된 양복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튼 생각은 마시죠.”

잠시 말뜻을 읽는데 시간이 걸린다. 방금보다 가벼운 비소를 머금었다.

“그러겠냐.”

히터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단지 비돌을 훑어보는 움직임인지 수긍의 뜻을 담은 고갯짓인지 천둥으로선 확신할 수 없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속내를 알기 힘든 녀석이긴 하더라도 나쁜 놈은 아니었으니까. 사채업자를 이리 높게 평가해도 되는 걸까 먼지 쌓인 도덕 관념으로 재보고 있으려니, 이제야 갈 생각이 들었는지 히터가 발을 뗐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무쪼록 몸조리 잘하시길.”
“그래...”

대답을 하다 목에서 힘이 빠지는 바람에 쉰 소리가 났다. 작게 마른기침을 한다. 쉬지 않고 걸어 혹사당한 다리가, 배트를 휘둘러댄 양팔과 허리가, 여느 쇠붙이보다도 잘 드는 종이에 베인 눈이, 펜싱 칼에 꿰뚫린 왼 어깨가 흔들리는 몸에 비명을 질렀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문고리를 잡던 히터는 힐끗 건물 그림자에 묻혀 있는 점보를 일별했다. 천둥의 둘도 없는 파트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잠시 고민한다. 입 밖으로 내기보단 삼키는 게 나을 말이었다. 영리한 머리가 근질거리는 혀를 위해 변명을 골라내 준다. 최강의 칼을 잃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음이 복잡했기에 담고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덜어내고 싶었을 수도 있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흐름에 몸을 맡겼다. 상상보다 강하게, 그러나 약하고 낮게.

"제게 다 맡기면 편할 텐데요. 몸도, 마음도, 고민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히터는 가끔 대화의 흐름에 타주지 않는 제 VIP 고객이 얄미웠다. 미간을 좁히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안부 인사나 재차 전하고 나가려는데 천둥이 입을 열었다.

"이미 그러고 있지 않나?”

잠시 멀쩡한 귀를 의심한다. 문고리를 잡았던 손이 뭉그적거렸다. 신중하고 또 침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대는 한없이 예측하기 쉬우면서도 결코 아둔하지 않은 자였다.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비돌을 세우기로 했을 때부터 우린 결국 한배를 탄 사이 아니겠어? 내가 그 돈을 갚지 않는다면 적자도 그런 적자가 없을 텐데. 몸이든 고민이든 그 계약서로 말 다 했지 뭐."

평소라면 웃으며 말할 것을 무덤덤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대화의 핀트는 엇나간 채였다. 아까 참아냈던 한숨을 내쉰다. 자조도 슬쩍 섞여 나왔다. 그러고도 놓지못하는 무언가가 앞니를 두드렸다. 스스로도 뭘 하는 건지 싶었지만, 이내 발끝을 돌려 선다.

"그럼, 마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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