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52 저스티스 리그 기반
“그래서 결국 둘이 무슨 사이인거냐?”
배트맨이 마침내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노려보자, 시커먼 남자의 주위를 떠다니던 그린 랜턴은 그것도 시선이라고 더욱 말을 늘어놨다.
“슈퍼맨이랑 너 말이야. 둘이서만 팀업도 했다고? 외계인 친구에겐 고담은 자기 구역이라며 뻐기지 않았나 보네?”
“겨우 그게 궁금해서 8분 21초 동안 얼쩡거린 건가? 시간이 버릴 정도로 많은가 본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렇지 않거든. 슈퍼맨과 나는 동료다. 참고로 알려주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그린 랜턴이 인상을 썼다. 배트맨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스크에 잡혀있는 주름일 뿐 가면 아래에선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린 랜턴과 언쟁을 할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소모적인 짓이었다. 배트맨은 그린 랜턴의 삐뚜룸한 입가를 보고도 모른 척 데이터의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녹색 빛을 꺼뜨린 그린 랜턴이 배트맨의 망토 자락을 아슬아슬하게 밟지 않도록 바닥에 내려섰다.
“정말 그게 끝이라면 슈퍼맨도 서운해할 것 같은데.”
“우린 친구다.”
“왜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는데?”
“말꼬리 잡지 마, 랜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지?”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고.”
배트맨은 곁눈질로 그린 랜턴을 살폈다. 진한 갈색 머리의 청년은 감시탑 외면을 덮은 통유리에 삐딱하게 기대있었다. 팔짱까지 끼고 온몸으로 불만족스럽다는 티를 내는 모습이, 팀과 패트롤을 다녀왔던 날의 막내 아들을 연상시켰다. 배트맨은 그린 랜턴 쪽으로 발을 조금 열고 섰다.
“서운함이라도 느끼나? 늘 말하듯이 넌 너무 밝아서-”
“나도 바쁜 몸이라고. 우주로 나가버리면 연락 수단도 마땅찮고. 아니, 그러면 빅 가이랑은 연락처 교환이라도 했나보네? 무슨-그린 랜턴은 짓궂게 웃으며 배트맨과 그 옆 어드매를 번갈아 가며 손가락질해 댔다-무슨 바에서 만난 사이처럼?”
“번호라면 알고 있다. 서로.”
“...시크릿 아이덴티티 쪽도?”
“그쪽을 묻는 줄 알았는데.”
그린 랜턴은 눈을 회동그래 뜨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이내 앓는 소리를 내며 유리에서 등을 뗐다.
“알고 싶지 않았어!”
배트맨은 무언가 요구하듯 자신을 향해 열어젖혀진 양팔을 보고 결국 미간을 좁혔다.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관계에는 관심 없나보지?”
“크립톤인이 일부다처제인지 알 게 뭐람.”
배트맨은 그린 랜턴이 툴툴댄 말에 기가 막혀서 말을 잃었다. 그게 얼마나 진귀한 일인지 자각조차 하지 못한 상대는, 새로운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탐정인양 턱을 감쌌다.
“그 둘 사이에 그렇고 그런 기류가 흐른다는 건 사이보그 꼬마도 아는 사실이지. 오히려 박쥐 네가 알고 있었다는 게 신기한데.”
“관찰해왔다.”
“역시 고담 제일의 플레이 보... 뭐?”
“그들은 우리와 달라. 초인 한 명 한 명이 이 행성 전체의 위협이 될 수 있지. 슈퍼맨은 그 뿌리가 외계에 있으며 인간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고, 원더우먼은 호전적이며 한 나라를 대표하고 있어. 둘 중 한 명이라도 적으로 돌아선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수단은 한정적이다. 힘의 균형을 위해서라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건전하겠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슈퍼맨과 원더우먼의 관계는 다분히 우려스럽다.”
배트맨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인간인 그린 랜턴의 반응을 기다렸다. 생각에 빠진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던 그린 랜턴은 헉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혹시 다이애나 쪽을...?”
하얀 손가락 사이로 나직이 중얼거려진 딴소리에, 배트맨은 어째서 그 가설을 더 늦게 생각해 냈는지 신경 쓰였지만 묻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우선하는 것의 진정한 위험성을 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알아, 알아. 그냥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농담 좀 해봤어.”
배트맨은 원더우먼의 문양이 새겨진 상자를 떠올렸다. 그 속이 텅 비어있는 것도. 배트맨의 시선이 그린 랜턴의 오른편 가슴에 머물렀다. 강철조차 종잇장처럼 베어버리는 다이애나의 칼이 긋고 지나간 곳이었다. 원더우먼의 힘은 몸소 알고 있을 텐데, 마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양 구는 것이 할 조던다웠다.
“네게 고민거리를 안겨주지 않음을 고마워해도 괜찮다.”
“거참 재밌네. 어디 한번 말해보던가, 내 귀는 열려있으니까.”
“랜턴. 넌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면 시야가 좁아져서 오히려 일을 복잡하게 만들 때가 있어. 가령-”
“갑자기 뭐야?”
“지금 내게 이러는 것처럼.”
“뭐? 뭔...”
이번엔 그린 랜턴이 입을 다물었다. 배트맨은 흥하고 콧방귀를 꼈다.
“다음부터는 말을 정리해서 오던가 해.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설프게 유도하지 말고 처음부터 부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럼 정말 아니라는 거야?”
귀가 열려있다고 하기에는 조언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군. 배트맨은 하루가 멀다고 부딪치는 그린 랜턴에게 한 방 먹여준 덕에 한결 기분이 나아져 있었다. 그래서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꼴이 재밌기도 했고.
“슈퍼맨이랑 사귀고 있냐고?”
배트맨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 이상의 관계라는 뜻이 숨겨져 있진 않지?”
“아까부터, 납득하지 않을 거면 왜 물어보는 거야?”
그린 랜턴은 돌변해서 으르렁대는 배트맨을 향해 양손을 들어 보였지만, 얼굴엔 실없는 웃음이 띄워져 있었다. 진중한 척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실상은 찌르면 반응하는 재밌는 녀석이었다.
“너네가 조금 의심스러워야지.”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배트맨이 눈 위를 덮은 하얀 렌즈를 가늘게 좁혔다.
“그럼 플래시와 너는 어떻지?”
“뭐? 친구 사이지?”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냐는 투로 즉답하는 그린 랜턴을 보고 배트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상상력은 그린 랜턴의 무기 중 하나인데도, 타인에게 공감할 때는 기능하지 않는 듯했다. 인류 조상의 대부분이 이 녀석 같았다면 문명은 꽃피지도 못했겠지.
“6개월 단위로 봤을 때, 너희가 우리보다 평균적으로 약 2.5배 더 자주 만났다. 정체를 숨기지 않고 만난 것만 따지자면 4배에 달해.”
“네가 음침한 거 너도 알지?”
“플래시는 슈퍼맨이 너보다 더 설득력 있고, 카리스마 있고, 키도 크다고 했지. 질투라도 하나?”
“남의 일기장이나 뒤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나도 귀가 열려있거든.”
“내가 배리 애인을 뺏었다는 이야기 할 때 너 없었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지.”
“어우, 아니라고.”
“우리도 그렇다.”
“자꾸 우리라고 하지 마! 이상하게 들리니까.”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가서, 할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보통 그러지 않는다고.”
“그는 보통 친구를 만들지 않아. 사람들 속에 어떤 식으로 녹아들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린 랜턴의 뇌리에 도통 속내를 보이지 않던 슈퍼맨이 스쳤다. 그런 음침함이 통해서 친구 혹은 그 이상의 관계가 된 게 아니란 말이야? 할의 입은 생각을 툭 내뱉었다.
“억울하네.”
배트맨이 한 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나 할도 방금 한 말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이은 설명은 없었다. 궁금해하고 고민하던 시간이 아깝다는 의미지, 하고 둘러대려다가도, 애초에 그 정도로 신경 쓸 일이었나 싶어졌던 것이다. 아니, 그럼직하지 않나? 그 배트맨과 슈퍼맨이라니, 온 지구가 떠들썩해질 뉴스거리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타고난 쾌남은 집중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바로 눈앞의 문제를 정리한 기쁨이지.
“아무튼, 그래.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구만.”
그린 랜턴은 배트맨을 따라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 앞에 섰다. 기동음과 함께 문이 열리는 동안, 그 뒷모습에 대고 배트맨이 말했다.
“리거들에게 신뢰 받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비춰.”
자동으로 닫히기 시작한 문틈 사이로, 할의 뺨에 보기 좋게 보조개가 패이는 것이 보였다.
“네가 제일 먼저 정체를 밝힌 건 나잖아?”
[팀(+)뱃] 未安 (0) | 2023.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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