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절 밀어내는 거예요?”
지쳐 있었다. 세상이 무너졌을 때부터 서서히, 눈이 하나 줄고 나선 크게 지쳤다. 그럼에도 이 천성을 버릴 수가 없어 되는 대로 끌어안고 손에 쥐었으니, 지옥에서 지켜야 할 것은 비단 제 목숨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이 궁할 인간성을, 감정을 줄곧 죽이지 않았다. 울었고 웃었다. 욕심이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많이도 잃었다.
턱을 괴고 바닥으로 시선을 깔았다. 눈이 피로해 아예 감아버린다. 어떻게 반응하려나. 화를 낼 수도 있었고, 슬퍼할 수도 있었다. 두 번째 바람이 머리를 스치도록 상대는 조용했다. 짧게나마 쉰 눈이 부드럽게 떠져 소년의 안면으로 올라가곤, 조금 커진다.
화나 보였다. 예상 범위였다. 그러나 단순히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정확히 읽어내려 전체를 시야에 넣는다. 영걸은 오른손을 꾹 쥐고 고르게 숨 쉬고 있었다. 어깨에 걸린 하얀 머리칼을, 일자로 닫힌 입을 훑곤 눈이 마주쳤다. 그늘졌음에도 투명한 눈동자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어 한숨으로 바꾸었다. 그래, 말로 해야 아는 게 사람이지.
“어. 널 이용해 먹지 않을 자신이 없어.”
즉시 달싹이는 입술을 보고 선수를 친다.
“내가 힘들다고.”
의식해서 얼굴을 굳혀두자 입이 다물렸지만, 눈빛은 그대로라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다. 곧 포기하겠거니 기다린지 몇 개월, 짝사랑에서 외사랑으로 변한 지 나흘째였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 고백이라니 어지간히도 눈치가 없는 건가 노려봤다 후회했었다. 그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 영 잊히질 않았다. 차일 거란 확신으로 가득 찬.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죄지은 느낌이라 일축하기에도 뭐한 게, 동하는 마음이 두통을 불러왔다. 정녕 미쳤냐, 동정심, 속에는 동질감? 이런 속내로 받아줬다간 둘 다 엿 되는 거라고… 시야의 구석에서 녀석이 손을 쥐었다 편다. 그 미미한 움직임에 습관대로 눈길이 간다.
“그럼 저도 이용하면 되겠네요.”
“그게,”
“저 자신 있어요, 맡겨주세요. 형 안 힘들게 할게요. 네?”
…말이 되냐.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기가 막혀 너털웃음이 나온다. 손으로 가리듯 마른세수를 했다. 네가 내 말을 끊은 게 처음인가, 쓸데없이 가늠하다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뭐가 힘들다는지 알겠어?”
“미안해질 것 같다는 거잖아요?”
“뭐?”
“못 챙겨줄까 봐 걱정된다는 거잖아요.”
말문이 막혀 눈을 깜빡였다.
“너 원래 이렇게 망상이 심해?”
“아니에요?”
“아니야.”
아주 거짓말은 아니니 일단 단언해놓고는, 속으로 정말 그런가 자문하기 시작한다. 제 연애관이나 되짚어보는데 상대가 묻는다.
“그럼 제가 죽을까 봐 그래요?”
순식간에 눈매가 날카로워져서, 영걸은 넘어가려는 침을 겨우 막았다. 암묵적으로 피하던 주제를 꺼냈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심호흡 한 번에 한 발자국 내딛는다.
“형, 저 악착같이 살아남을게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저도 7년 동안 지상에서 생존한 데다, 대피소의 보초를 서는 일, 그 사채업자가 형한테 시키는 일보다 안전하잖아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형보다 제가 더 오래 살 거라고 할걸요?”
천둥은 무표정으로 돌아가 팔짱을 꼈다. 서늘한 눈이 제 목을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영걸이 멋쩍게 감싸 쥐었다.
“이건, 형 만나기 전이잖아요. 이제 안 그래요.”
“그걸로 설득당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네. 전 그냥…”
계속 말하라는 양 밀려 올라가는 눈썹을 보고도 그냥 웃고 만다. 무언의 대치가 이어지다 결국 천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함께 있으면 에너지를 받는 건지 앗기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럼 우리 둘 중 하나만 살 수 있는 상황이면 어쩔래.”
영걸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자신도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고개가 들렸다. 무슨 대답이 나오든 천둥은 거부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형을 살려야죠.”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아니,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고요! 어떤 상황인지만 설정해 주세요.”
“이게 무슨 심리 테스튼 줄 알아? 간다.”
이를 물던 영걸이 비돌로 향하는 천둥의 등에 대고 외치듯 제안했다.
“그럼 같이 죽을까요?”
멈칫 걸음이 느려졌다가, 도로 속도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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