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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 개기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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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eolsi 2020. 6. 22.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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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긴개님 작품 <불멸의 날들> 2차 창작
※에피소드 '모든 개들은 천국을 간다' 열람 후 읽으시는 걸 추천드려요 (등장인물 이름 네타)
※갑자기 시작해서 갑자기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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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개기일식이래요."

사무소의 청소를 마친 멸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맞은편 데스크에 앉아있던 필은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답할 뿐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15년은 못 본다는데, 나가볼까요? 여기선 해 안 보이고."
"별로 상관은 없는데... 그냥 보면 안되지않냐?"
"눈에 안 좋다고 써있긴 했는데 저희 기준으로 어떨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사님께 여쭤보면 아시려나."
"뭘 그런 거로. 구멍만 있으면 간접적으로라도 볼 수 있다는데? 나뭇잎 사이로 생기는 그림자라던가, 크래커..."

그새 검색을 해본 건지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던 필과 멸의 눈이 동시에 탁자 위로 모였다가, 서로 마주했다. 어제 사다 놓은 크래커가 남아있었다.

"빠삐용도 같이 나가자."

올려달라는 듯 히웅히웅 우는 빠삐용을 안아 올리면서 멸이 부드럽게 웃었다. 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근처 공원으로 나가 천천히 걷기시작했다. 초여름의 신선한 바람이 풀내음을 가득 실어 와서, 아기강아지는 연신 코를 킁킁댔다. 달이 해를 조금씩 가려가고 있었다. 망원경과 필터를 든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고, 대부분 맨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멸자가 실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막상 나와보니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앗."

멸이 우뚝 멈춰서서, 필도 한 발짝 더 나아갔던 몸을 돌려세웠다.

"뭐야. 왜 그래?"
"아래 좀 보세요."

보기 좋게 풍성한 공원수의 그림자가 바닥에 손톱자국을 수놓고 있었다. 바람이 잎을 흔들 때마다 반달이 타일 위를 떠다녔다.

"신기해요."
"좀 징그러운데."
"소장님도 참..."

뭐가, 왜. 필은 측은함까지 담고 있는 눈빛을 피해 음료수를 사러 갔다. 가까운 벤치에 엉덩이를 붙인 멸은 빠삐용에게 일식에 대해 설명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무를, 그 너머를 바라봤다. 실명 걱정 없이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무엇이 보일까. 푸른 눈동자 앞으로 불쑥 투명한 아이스컵이 내밀어진다.

"눈 나빠진다."
"...나뭇잎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모르지, 그건. 여튼 안경 쓰고 다니기엔 이러저러 귀찮으니까 보지마."

멸이 일회용 투명컵을 받아들자 필이 옆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자세를 지적할까 잠시 고민하다 빨대에 입을 댔다. 시원한 레모네이드가 넘어 들어왔다. 멀지 않은 언덕 위에서 두 쌍의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고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나의 눈은 저 아이들의 눈보다 못했다. 돌연변이라 할 수 있는 이 몸은 느리고 확실하게 죽음을 향해가고 있었다. 태양에 타들어 가는 것은 필멸의 존재였다. 품 안에서 빠삐용이 바르작 자세를 틀었다. 따뜻한 온기가 꼬물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상념이 슬 가라앉는다. 돌연변이라도 나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 곁에 있는 이 사람처럼.

"후후."
"...?"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하는 필을 그저 바라본다. 꺼림칙하다는 듯이 다리를 풀고 상체를 비스듬히 낮춘다. 그러면서도 레모네이드를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장갑 낀 손으로 든 레모네이드를.

"크래커, 뜯을까요?"
"어? 어... 그럼 볕으로 나갈까."

얼떨떨하게 필이 일어섰다. 말 잘 들을 땐 괜찮은데 말이지. 입 밖으로 꺼낼 일 없는 것을 떠올리곤 흘려보낸다. 필이 양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어차피 나무 그늘에서 본 거랑 똑같이 보이는 거 아니야?"
"느낌은 다를 것 같은데요. 기왕 가져왔으니 해보는 거죠, 뭐. 앞으로 15년은 못 본다는데."

15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우리들에겐 더욱더. 멸은 포장비닐을 뜯어 필에게 크래커를 건냈다. 일렬로 서있는 크래커를 부서지지 않게 사무실까지 옮길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언덕에서 해를 보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혹시 크래커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제 동생 체질이..."

쭈그려 앉아있던 필이 벌떡 일어섰다. 크게 떠지는 멸의 눈에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회복이 느린 체질이거든요. 아빠들이 눈 아프니까 필터 없이 보지 말랬는데, 필터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어요."
"...어, 응! 물론이지."

허둥지둥 크래커를 내밀려다 자기 몫을 하나 빼놓고 포장비닐 채로 아이에게 넘겨주었다. 멸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필에게 다가섰다.

"저는, 필멸자랑 만나게 된 줄 알고... 심장이 아직도 빨리 뛰어요."
"내 말이.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고 있어."

분하다는 듯 아이들의 뒷모습을 잠시 노려본 필이 크래커로 눈을 도로 옮겼다.

"아까보다 더 잘 보이긴 해. 해 봐."
"그래요?"

멸은 하나 남은 크래커를 들어 빛을 가렸다. 필이 든 크래커와 나란히 들린 크래커의 구멍을 통해 아홉 개의 반달이 나타난다. 도합 열여덟 개의 반달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빠삐용도 빼꼼 고개를 내밀어 달이 해를 가린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멸은 어느샌가 자신의 입이 벌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다물지 않고 슬쩍 필을 일별했다. 일별하려고 했다. 멸이 필에게 시선을 던졌을 때, 필은 이미 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로 잠시간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왜요?"

필은 대답 없이 바닥으로 눈을 옮겼다. 멸도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자신도 이유가 있어서 필을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은 그렇게 작은 손톱자국을 바라보다가, 이내 사무소로 발을 옮겼다. 초여름이라도 햇빛은 덥게 다가왔다.
멸도 필도, 사무소로 가는 길 위에서 각자 15년 후의 일을 생각했다. 그때도 서로가 있을지를. 다시 한번 달이 해를 가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