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유리 (미완)

myeolsi 2021. 5. 14. 19:36

 쨍그랑 소리가 들렸다.

 얄팍한 문에 대고 노크하려던 손이 멈췄다. 머뭇 거뒀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주눅 든 주먹이 헛손질을 해댔지만 어찌저찌 똑똑 소리를 낸다.

 

“형?”

 

깨지는 소리 이후 내리 잠잠한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곧 잘그락 소리를 잡아낸다. 유리를 지르밟는 소리였다.

 

.”

 

 쉰 목소리였다. 날이 선 게 느껴져서, 꿀꺽 침을 넘겼다. 상대도 그리 생각한 것인지 다시 묻는다.

 

무슨 일인데?”

 

한층 누그러진 어투에 그제야 입이 떼어진다.

 

, 누가 찾아와서형을 만나러 왔대요.”

 

 질문이 이어졌다. 발소리는 없었다.

 

누가.”

그냥 형 친구라고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외관을 묘사하자 제자리를 맴도는지 박살을 내는지 작게 으직으직 소리가 이어졌다.

 

모자…”

 

 하고 웅얼거리기에 후드에 감싸여 있던 것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검고, 유명한 브랜드 로고가 박힌소리가 멈춘다. 여전히 답이 없어 또 속이 졸아드는데, 급작스레 저벅저벅 발걸음이 다가와 뒤로 몸을 튀었다.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이어져 열리는가 싶더니 다시 침묵한다. 두근대는 가슴을 쓸어내리자 도로 발소리가 멀어진다.

 

지금 어디 있는데.”

일단 못 들어오게 막았더니 그럼 기다리겠다고 대피소 앞에 걸터앉던대요.”

 

 다시 문에 다가선다. 깨진 것을 정리하는지 서로 부딪치며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쏟아지며 쓰레기통을 울린다. 몇 번 반복되더니 아까보다 작은 보폭으로 걸어오기에 비껴섰다. 달깍 문이 열렸다.

 

연락하지 그랬냐.”

 

 가라앉은 시선을 마주한다. 메시지를 세 개나 보냈다는 말은 구태여하지 않았다. 급할 때 아니면 문자로 하랬고앞장서는 비돌의 지주를 쫓아갔다. 아주 나란히 걷지는 않았다. 힐끔 시선을 던져봐도 상대의 굳은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앞만 보고 있다.

 

 

 

 

 

 

 

*

 

 

 지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방에 늘어져 있었다. 존재가 기적이라 할 수 있는 휴일에도 아무런 의지가 들지 않아 그저 기대앉아있는데, 간간이 굴러가던 눈에 아저씨가 마시다 남았을 양주가 들어왔다. 눈을 깜빡이다 도로 돌렸다. 가지러 가기도 귀찮았고, 딱히 흥미도 없었다. 그러나 무료함과 함께 우울이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여 벌떡 일어선다. 이리저리 서성이다 술병 앞에서 발을 멈췄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들어올리자, 생각보다 남은 게 없는지 훅하고 들린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에서도 어둡게 빛을 반사하는 술병을 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잔도 없었고 차라리 잘됐다 싶어 뚜껑을 열고 찰랑 소리를 들었다. 맛없는 냄새. 그대로 목을 젖혀 들이키니 순식간에 속이 뜨거워져서 얼굴을 구겼다. 한숨을 내쉬며 다 꺼진 소파에 몸을 더욱 묻었다. 이내 열이 온몸으로 퍼졌다.

 

 환상인지 꿈인지 깊이 빠졌었나, 날카로운 소리에 퍼득 눈을 떴다. 식은땀이 나는 불쾌한 감각에 등을 뗐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깨진 유리 조각이 보였다. 의식이 흐릿할 때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듯했다. 치울 생각에 발로 죽 그으려는데 슬슬 익숙해진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무게 실린 신발바닥이 유리를 눌렀다.

 

.”

 

 상상보다 작고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 자각하곤 목을 가다듬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의아해진다. 친구? 모자? 아직 홧홧한 장기가 생각을 방해한다. 발밑의 조각들을 담뱃불 끄듯 발로 비볐다. 이어지는 서술에 고개가 휙 들린다. 머릿속에 반가운 이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당장에 일어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샐쭉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장갑을 끼고 큰 조각들만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 너머의 상대가 당연히 기다릴 거라 여긴다. 마지막으로 쓰레기통에 떨구어내곤 그제야 방을 나섰다. 친구를 입에 담을 상대배트를 까딱거린다. 적당히 둘러댄 단어라면 후회하게 해주리라.

 

 

 

 

 

 

 

*

 

 

왜 이렇게 늦게 와?”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혹은 부들부들 떨리려는 전신을 멈추는데 온 힘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급속도로 핏기가 가시는 천둥의 얼굴을 보며 영걸도 덩달아 불안해진다.

 

?”

 

 

 

 

 

 

*

 

 

 

 자세도 바꾸지 않고 저를 노려보는 두 놈을 힐긋 쳐다본다. 경비도 생기고 다 좋은데 찾아온 놈이 영 나오질 않았다. 여유롭게 하늘이나 보는 것도 슬슬 따분하여 직접 찾으러갈까 갈등하던 차에 드디어 발소리가 들렸다. 놀래키는 즐거움 정돈 즐길까 싶어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헤어진 날부터 고대해온 재회의 순간에 절로 입꼬리가 당겨짐도 잠시, 거의 송장으로 보이는 안색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놀라는데. 저러다 숨이라도 넘어갈까 몸을 일으키자, 천둥이 기다렸다는 듯 뒤돌아 내뛴다. 어이가 없어 입이 작게 벌어졌다가, 꾹 눌러 닫았다. 챙 아래서 뜨인 눈이 그 뒤를 서늘하게 쫓는다.

 

 

 

*

 

 

 

 

 

거짓말.

진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놈이 두 다리로 일어선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리고 나서야 저를 되돌아보듯이, 직면한 순간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기저에 깔린 방어기제가 도망가자 외친다.

주저 없이 팔다리를 뻗었다. 갑작스레 힘이 들어간 근육이 놀란다.

 

 

기뻐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뒤이어서,

그럼 럭키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