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럭천] 어느 날

myeolsi 2020. 11. 8. 13:04

방을 들어서면서부터 두리번거리는 럭키에게 진수가 툭 말을 던진다.

"햇빛 쐰단다."

그제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시선이 소파 위에 멈춘다.

"넌?"
"자려고."

뒤돌아 방을 나서는 럭키를 일별하곤 이미 잠에 빠진 점보를 베고 누웠다. 이젠 누굴 찾는지 어떻게 알았느냐 궁금해하지도 않는 게 웃겨서 입꼬리만 올렸다.

익숙한 길을 되짚어 오르니 옅은 구름에 걸러진 햇빛이 부시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요즈음 비돌 밖으로 나올 땐 항상 밤이었던가, 몇 시간이고 지하에서 노동한 것을 떠올리자니 흐린 빛도 충분히 포근하게 다가왔다. 지상은 여느 때와 같이 부서진 잔해들이 그득히 쌓여 온통 검회색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꼴에 여름이라고 듬성듬성 보이는 잡초가 정경의 답답함을 덜어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게 좋으려나, 한쪽 면이 무너져내려 속이 드러난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문짝도 없는 설주를 지나자 웬 연보라색이 눈길을 끈다. 꽃망울을 맺은 라일락 나무였다. 천장에서 튀어나온 수도관에서 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리 식물에 대해 모르는 저라도, 이 정도 크기의 화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물이 필요하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벅, 발소리가 들려서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즉슨 돌보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자세를 조금 낮춘다.

"어, 럭키!"

긴장시켰던 근육이 한순간에 풀린다. 한 손에는 배트를, 반대 손에는 1.5리터 페트병을 든 천둥이 활짝 웃고 있었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왔대."

딱히 대답을 바라서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그대로 저를 지나쳐 화분으로 향한다. 처음부터 뚜껑이 열려있던 통을 기울여 겉만 젖은 흙을 아주 적신다. 곧 화분 받침에서 넘친 물이 바닥의 균열을 타고 기어 나오자, 그 광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천둥이 이리 오라 손짓했다. 지시 같은 부탁대로 화분을 들어 올리고 있자 물이 찰랑거리는 받침을 조심조심 들어 다시 붓는다.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도 않았음에도 코끝에서 달큰한 향이 맴돌았다. 잎가지 사이로 마주친 청회색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라일락 잎 먹어본 적 있어?”

화분을 내려놓고 흙먼지가 묻은 손을 털었다. 눈썹 사이를 조금 좁혔다. 잎을?

“아니.”

천둥은 주저 없이 장갑을 벗더니 작은 잎 하나를 따서 내밀었다. 하트 모양 잎을 의뭉스레 쳐다보자 아예 입 앞으로 옮겨준다.

“사랑의 맛이라고들 하던데.”

영 찜찜했지만 들이민 걸 거절하기도 뭣해 물고 씹었다. 예상했던 풀 향이 느껴지기 무섭게 정형화된 사랑처럼 달콤쌉싸름… 하기는커녕 떫다 못해 쓰디쓴 맛에 저작을 멈춘다. 일그러지는 안면을 보며 천둥이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했다. 이 자식, 삼켜버리곤 성을 낸다.

“장난치냐! 이게 무슨 사랑의 맛이야!“
“푸하하, 왜! 원래 그런 법이지. 미리 알아두라고. 사랑은 그런 맛이니까.”

쓴맛을 몰아낼 거리도 없어 그저 캑캑대고 있자니 분해지는 게, 저도 도발을 담아 지껄인다.

"그게 남자친구한테 할 말이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 천둥이 휙휙 고개를 돌려 주의를 살핀다.

"미쳤어? 저번에도 그러다가 림솔한테 들켰으면서 배운 게 없냐!"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핏대가 꿈틀 섰다가 한숨과 함께 사라지는가 싶더니, 측은한 눈빛을 하곤 럭키의 어깨를 툭툭 다독인다. 너한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전해지는 메시지에 결국 얼굴을 붉혀가며 말다툼을 시작한다. 이마가 맞닿도록 얼굴을 들이밀고 눈이나 부라리고 있자니, 천둥이 먼저 짧게 웃어버린다. 성을 덜 냈는지 뭐가 우습냐며 열을 올린 럭키의 뒷목을 감싸 잡아당겨 그대로 입술을 맞댔다. 이 작은 접촉에 속이 간지럽도록 행복해지니 사람이란 참 단순한 존재라. 당황해 굳은 놈 놔두고 장갑을 도로 낀 천둥이 빈 페트병의 목을 잡아들었다.

“가자. 키스는 안 해줄 거야.”
“…어디로?”

괜히 시선을 돌리는 럭키를 보며 천둥이 손가락을 들어 뚫린 천장을 가리켰다.

“옥상. 해가 제일 잘 들거든.”
“그럼 저것도 거기로 옮기지?”

문턱을 넘으며 천둥이 말했다.

“저거 두 달 전에 발견한 거야. 천천히 죽어가는 수준이긴 했는데 내내 저기서 버텼던 거니까 괜히 건들었다가 죽을까 봐.”

일리 있는 견해에 끄덕이며 따라나서자, 깨진 복도 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천둥을 비추고 있었다. 어깨에 기대놓은 배트가 희미하게 빛났다. 익숙해서 걸음도 느려지지 않았다. 녀석도 자신도 이름값은 톡톡히 하니까.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