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천힡]
근처에 돌담에 기대앉아 깊게 숨을 내쉬었다. 키 작은 나무의 윤기 나는 나뭇잎을 손으로 쓸다가, 뚝 가지를 부러뜨렸다.
그리움을 돌려받은 날,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났었다. 한순간도 잊지 않은 이를, 어째서 잊지 못하는지 느낄 수 없어진 머리로 수없이 되새긴 이를 향한 감정이 급작스레 밀려왔다. 비틀대며 제 신전에 돌아와서도 내리 낙루했다. 이틀간 비만 내리다, 찾기 시작했다. 도시란 도시를 닷새간 뒤졌다. 방금까지 이곳을, H.H의 도시를 돌아보던 참이었다. 두 번째 재앙 탓에 이곳저곳 무너진 도시를 복구하는, 예전의 자신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줄 만한 기특한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다 변두리로 나왔다. 그런 류의 감정을 돌려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몇 개나 남았는지 잠시 가늠하다 그만둔다. 남의 걸 빼앗아놓고 뭘 차례로 돌려준대. 싱그러운 풀 내음이 퍼졌다. 아직 분노를 받지 못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이라면 이렇게 느꼈겠지, 떠올릴 뿐이라. 흘러가는 구름이나 올려다보다, 손가락 사이에 두고 굴리던 나뭇가지를 머리 위로 휙 던졌다. 아까부터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괘씸했다.
"악,"
기억에 불을 붙이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아프잖아! 남의 집 아래서 뭐해?"
멎었던 숨을 들이켰다.
질리지도 않는지 눈시울이 화끈해지기 무섭게 눈물이 흘렀다. 어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그토록 보고 싶던 이가 보였다. 퍽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움이 녹은 자리에 반가움과 기쁨이 솟았다. 깨닫고 의문에 고개를 작게 숙였다. 기쁠 때 자신이 울었던가?
“뭐, 울어? 왜 울어?”
어느새 돌담에서 내려와 제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입을 열자 볼품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귀에 들리는 음성이 자신의 것이 맞나 의심 갈 정도였다.
"천둥."
사랑했던 이였다. 인간이 늙지 않는 몸을 가졌을 적에 별 지랄을 다 하고 이어진 연. 제가 막지 못한 재앙이 지상을 덮칠 때 남 구하겠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 수마에 휩쓸린… 생기 넘치는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나?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그 어벙한 꼴이 웃겨서 짧게 웃었다. 그러자 자신은 기쁠 때 대체로 웃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눈물을 떨구어 내고 눈을 맞췄다.
"이름 그대론가 보네."
"뒷조사라도 했어?"
"이번엔 뭐하고 사냐."
"우리 어디서 만났었나?"
"내 도시로 가자."
서로 다른 말을 하는 탓에 천둥의 눈썹이 휘었다. 운 주제에 살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대를 뜯어보다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입꼬리를 올린 채 남자도 일어섰다. 흙바닥에 앉은 적이 없다는 듯 말끔한 옷을 일별하곤 천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호라도 받나 봐? 다른 도시 사람 같은데 무슨 볼일?"
"너 찾으러."
"왜?"
"데리고 가려고."
"아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해서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걸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가호를 받는데 미쳤다라. 달의 신인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미소가 더 짙어진다. 무해해 보이긴 하는데... 웃긴 왜 웃어, 정들라.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도시를 가로질러 퍼졌다. 짧게 고민한다.
"일단 들어가자."
발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따라붙는 상대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게 꼬였네.
식사 내내 자신만 쳐다보는 게, 시선이 따가워서 이것저것 권해도 보고 질문을 해봐도 한결같이 자신을 맞이하러 왔다는 소리만 해댄다. 자신은 됐다며 넘겨준 빵을 야무지게 씹으며 노려본다. 기어이 일터까지 따라오는 놈을 막을 방도가 없어 또 한숨을 쉬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신전을 둘러봤다. 가끔 지나가는, 천둥과 같은 옷을 입은 신관들을 짧게 훑었다. 이걸 어떻게 빼 오지.
말단인지라 늦게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다. 장부에 온점을 찍고 마르길 기다리는 동안 길게 기지개를 켜다, 자신이 데려온 이방인과 눈이 마주친다. 몇 시간 전에 본 자세랑 똑같은데. 끼익 의자를 끌어 일어나자 입을 뗀다.
"끝났어?"
"거의."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둔 남자를 멀거니 바라봤다. 창이 저렇게 컸었나, 주홍빛 구름에 감싸인 듯한 상대가 덥석 손을 잡고는 이끌었다. 찰나의 일이라 뭐라 반응하지도 못하고 함께 신전 안쪽으로 향했다. 한쪽 눈을 가린 상 앞에 서서, 크게 폐를 부풀린다. 어, 야. 신전에선 정숙...
"히터!!!"
몸을 관통해서 쩌렁쩌렁 울리는 게 어지럽기까지 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선 느낌을 뒤로하고 급하게 잡힌 손을 당겼다.
"미친놈아! 신을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
식은땀이 흘렀다. 몸을 숨기자고 끌어도 그저 웃고는 꿈쩍도 안 한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지금이라면 저 상판에 주먹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려봐. 얘기 좀 하게."
"얘기고 뭐고 천벌로 죽고 싶냐!"
"제 신전에 무슨 일이신지."
딸꾹, 입을 막았다. 조각상 뒤에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진짜 왔잖아.
"히, 히터. 아니 히터 님. 이놈 정신이 좀 아파서..."
"왜 숨겼냐."
"야 존댓말 써!"
눈을 대록대록 굴리며 제 눈치를 보는 천둥에게 괜찮다며 손짓한다. 그보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투신이 저런 취급을 받고도 의연한 게 웃겨서, 히터는 입가를 매만졌다.
"숨겼다뇨, 무엇을요?"
느껴야 할 감정이 없어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천둥. 내가 찾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가 당신이 찾던 이입니까?"
눈빛이 더욱 차가워진다.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인간을, 그저 이름 외관 똑같다고 곁에 잡아둘 셈이신지."
"어."
공기가 가라앉았다. 천둥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뭔 소리들이야 진짜? 상황 설명 좀 해주시지, 요?"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제 신도를 바라봤다.
"평소 말투로 괜찮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
옛날이야기로 넘어가야겠군요. 창세에... 예? 아. 중요한 부분만. 흠... 그럼 한 신이, ...이건 생략 못 합니다. 첫 번째 세상, 인간이 불멸의 존재일 적에 투신鬪神이 어느 인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재앙을 내리자는 주신의 의견을 반대했죠. 네. 대홍수. 아시는 대로 대홍수는 일어났죠. 그 신을 지하에 가두고 진행했거든요. 반대했다는 게, 말로 설득한 게 아니라 신전에 쳐들어온 거라. 투신답다고 해야 할지... 어쨌건, 그 신은 두 번째 세상이 시작되고도 내내 갇혀있었습니다. 아, 그렇죠. 명색이 투신인데 얌전히 있었는가. 이 부분이 재밌는 부분이거든요. 주신이 투신을 가둘 때, 복수하러 올 것이 두려워서 감정을 앗아갔습니다. 때문에 백년이고 천년이고 조용했는데, 6년 전 대지진 후에 풀려났죠. 신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아실 테니 넘어가고... 두 번째 재앙을 반대한 신들이 권력을 쥐고, 바뀐 주신이 투신을 풀어줬거든요. 그런데 당장에 감정을 돌려줬다간 광기에 빠질 거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와서, 조금씩, 순차적으로 돌려주기로 약속합니다. 사실 회유한 신들까지 죽이려 드는 걸 막을 생각이었겠지만. 투신은 자신의 도시로 돌아가서 재건에 힘씁니다. 주신의 도시에 합해지듯 살아남았던 도시를 다시 돌보기 시작했죠. 들어보셨나요, 천둥이 치지 않는 도시. 슬슬 감이 잡히시는지.
이레 전에, 주신이 그리움을 돌려줬습니다. 투신은 이틀을 내리 울고, 사랑하는 이를 찾으러 다니기로 했죠.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건지 만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제 도시를 방문하셨네요.
*
천둥은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는 히터를, 제가 모시는 신을 노려봤다.
"그래서. 이게 그 투신이고, 내가 그 연인이다?"
엄지로 등 뒤를 가리킨다. 내내 제 뒤에 붙어 서 있던 남자가 손끝에 툭 닿았다.
"그런 셈이죠. 신관을 달라고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어째야 할지..."
"당연히 거절해야지! 난 오늘 처음 만났다고."
"그야 인간 입장에선 그렇겠지만,"
히터와 천둥의 눈이 한곳으로 모인다. 곁에 앉아있던 신이 눈을 깜빡였다.
"...저희는 또 아니거든요. 아직 분노는 못 돌려받았나 보죠? '이거' 취급을 받고도 조용하신 걸 보니."
"그걸 벌써 돌려줄 리가 있냐. 내 도시로 데려갈 거다."
"본인 의사는 물어보셨는지?"
이번엔 히터와 남자의 시선이 천둥에게 향했다.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잘한다. 안된 이야기였지만, 자신으로선 달리 내놓을 답이 없었다.
"안 갈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
의중을 살피기 힘든 음성이었다. 눈을 들어 히터를 봤다. 다행이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고 싶다고 하게 해주지 뭐."
어딘지 익숙한, 그러나 본 적 없는 오싹한 웃음을 내보인다.
*
진체眞體의 눈을 떴다.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느리게 눈을 굴려 천둥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사랑을 돌려받지 못했다. 줄곧 비어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거부당했을 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운했다. 섭섭했다. 더 어둡고 부정한 감정도 물론 들었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랜 친우에게 느낄 정도의 감정이었다. 당장 끌고 오지 않은 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늘어나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들의 신전으로 걸음한다. 예상대로 히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놔주진 않을 테고. 뭘 원하지?”
“저야 천둥 님이 원하신다면 보내 드릴 셈입니다. 느끼지도 못하는 사랑 운운하는 신은 안 따라가실 거라 믿어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명백한 도발에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찬찬히 내려가던 시선이 재차 녹색 눈과 마주한다.
“대가를 말해.”
특유의 깊은 미소를 짓는다.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