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땡천] 이해2

myeolsi 2020. 8. 15. 00:37

+원작 날조(~시즌 2)
+가벼운 자해 묘사










"땡전이더라."
"?"
"뭐래냐."
"땡전이 내 반려라고."

고요가 공간을 채웠다.

"뭐?"

럭키가 되물었다. 천둥은 이마를 짚고 있는 진수를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땡전이 내..."
"이런 미친!"
"아니 멱살은 왜 잡아?!"
"미친놈아!!"
"뭐가!!"

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점보가 드잡이하는 둘을 번갈아 보며 절절맸다.


*



봉천역은 실험체로 가득했다. 천둥은 저가 잡아 넘긴 면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버려진 놈들. 지상이 지옥이 되기 전부터 쓰레기였든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쓰레기가 되었든 동정심은 없었다. 자기 연민은 하지 않는지라. 지체할 시간이 없어 거대한 문으로 발을 옮긴다. 죽 늘어서 있는 반송장 사이를 걸었다. 알뜰하게 재활용도 하는구나. 문득 이 치들을 끌고 가던 녀석을 떠올린다. 그 자식이 손수 처넣었을까? 어깨에 기대어 놓은 배트를 만지작댔다. 근신 중이라 다행이라고, 무른 생각을 했다.

무수한 화면 속에서 천둥을 찾아낸다. 지하에 들어왔다면 마땅히 이어졌을 거리인데, 여태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 강해졌구나. 들숨에 담배 연기를 가득 머금었다. 아주 기대가 됐다.


수감되어있다며! 속으로 욕을 욕을 한다. 럭키와 땡전의 주먹이 맞붙자 제 뼈가 진동했다. 어떻게 구슬려야 하나 머리를 팽팽 굴리는데, 럭키가 의도 없는 도발을 한다. 눈이 크게 떠졌다. 제 반려라고 힘 빼거나 하지 말랬지, 언제 입을 털랬냐! 자신이 말한 것도 아니니 저게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다.
말리다가, 선이 그어진다. 아주 그어진다. 조급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던 머리가 사늘하게 식었다. 그러냐. 그러겠지. 지하 놈들은 이랬지. 이름 붙이기도 뭐한 배신감을, 서운함을 씹어 삼키자 파란 분노가 속에서 응어리졌다. 아득바득 웃어 보이며 배트를 바투 잡았다. 뭣 같은 기분 풀기 위해서라도 좀 패야겠다... 할 것 같냐, 멍청아. 여기서 죽겠다는 얼간이를 데리고 도망친다. 등 뒤에서 땡전이 목청을 돋우었다.

"안 싸우고 어디가!!"

미친놈. 고통을 두 배로 겪는데도 싸움에 눈이 저리 돌아갈 수가 없다. 다시는 보기 싫은 얼굴을 마주하도록, 철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굳이 이러게 한다.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나 이랬다.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끝을 내길 바랐다. 빤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덤벼든다.

등이 욱신거렸다. 척추를 정통으로 부딪쳤군. 후 자연을 내쉬었다. 비틀대는 천둥에게 제안했다. 혹은 명령이었다. 죗값을 치르고 나가라고. 신도림으로의 침입은 마땅히 현상금이 붙을 범죄였다. 이대로라면 다시는 그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모질게 말한다. 다른 사냥꾼에게 끌려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읽혀서 기가 찼다. 단순한 게 녀석다웠다. 왜, 그러면 괜찮아질 것 같나? 아주 거짓은 뱉지 않는 주제에 저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선언했고, 은연히 저들을 각별한 사이라 여긴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니, 되돌아갈 일 따위 없다.



*


밝은 낮의 하늘 아래로 생환한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옷 아래서 베인 살이 따끔거렸다. 장갑 속이 배어 나온 피로 축축했다. 그렇게 가까이 반려가 있는데, 칼날을 그러쥐어? 마디마디가 아려와서 팍 인상을 쓴다. 이래놓곤 죽이지 말라고 이종이를 설득하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그야 그러시겠지. 이 목숨 끊어질 때까지 지도 아플 테니까. 다른 이유는 일절 떠올리지 않으려 퐝코를 노려봤다. 잃고만 왔으니, 후하게 갚아줘야겠다.


*






오른발, 좌측 회전. 그대로 왼발을 들어서 관자놀이를, 치면 다리가 잘리겠군. 궤도를 바꿔 상상 속의 상대가 치켜든 무쇠 칼을 쳐낸다. 재차 자세를 잡고,

"크..."

급작스레 심장이 욱신거려 푹 몸을 숙인다. 고통으로 가늘어진 눈이 정적뿐인 옥 안을 살폈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단순한 외상과는 다른 통증이 가슴을 옥죄었다. 곧바로 천둥을 떠올린다.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로 다쳤다고. 밭게 기침하며 간만에 일어선다. 또 지하로 들어왔나? 아니면, 아니면 죽었나? 문으로 다가가다 발을 멈췄다. 잠시간 그리 존재하다 도로 앉는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왜 그리 천둥네를 감싸냐고 다그쳐 묻던 이종이의 모습이 선명했다. 담배를 길게 태웠다.


*


럭키, 럭키...


*











무릎 꿇은 녀석에게 십자성의 말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를 하고 돌아서면서, 이놈이라면 천둥의 소식을 알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한다. 담배를 잘근대다 충동을 접었다. 무의미했다.
처음엔 다쳐서 잠적했구나 싶었다. 종이만 해도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는데 천둥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반려라 밝혀버리고 신도림으로 끌어들일까 상상도 했었지만… 수단을 고르지 않겠다던 총리를 떠올린다. 자칫하면 서로의 약점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시간이 더해질수록 지나간 때를 음미하는 자신이 있었다. 잘라내고 묻어버려도 다시금 엄습해왔다. 행동하지 못한 채 나간 전쟁의 한복판에서 소재만 겨우 듣는다. 생각지도 못한 지명에 얼이 빠졌었다. 아예 떠나버린 것인가? 내려앉는 가슴을 부정하며 당장이라도 잡으러 가고 싶었지만, 강북인들의 함성이 귀를 메운다. 개운하게 싸워줄 놈도 없으면서 몰려들긴 왜 몰려들어? 이를 바득 갈았다.

고요했다. 파도 소리와 심음이 규칙적으로 얽혔다.
아팠다. 아플 때마다 머릿속을 찾아오는 이가 있어 더욱이 엿 같았다. 제 고통을 한 치의 차이 없이 느끼는 존재를, 병든 지금 절실히 원한다. 알아주길 바라는 자신이 역겨워 마지않았다. 왼 눈을 더듬었다. 선명한 흉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장 보통의 방식으로 구현된 고통을, 그 자식에겐 남지 않았을 상처를 무딘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거지 같아. 떠올린 단어에 헛웃음을 삼켰다. 피 냄새가 났다. 멈추지 않고 긁어내리자 기분이 좀 나아진다. 속이 비틀리다 못해 반대로 펴져서, 잘못됐을지언정 괴로움은 덜했다. 눈두덩이에 열이 모였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면 되었다. 반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통증을 혼자서 곱씹는다. 곱씹다가, 치료하러 일어섰다. 내일도 싸움길에 올라야 했다. 살아남아 강해지기 위해선 오래 허우적댈 수 없었다.








*

이 새끼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게 재미있나? 대비하지 않은 마음이 혼란했으나 단련된 몸은 덤벼드는 구둣발을 막아낸다. 넓은 도로 위로 옛 연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해받는 일은 허다하니 억울하지 않았으나 말하는 꼬라지가 아주 못마땅했다. 무른 공격도 장난하자는 건가 싶어 빡이 치기 시작한다. 반려라고 봐줄 일 없는 건 서로가 아는 일인데, 힘 조절을 해? 내찌르는 다리를 잡곤 무쇠 배트를 우그러져라 쥐었다. 입에 담은 이름, 나 때문에 묘비에 새겨졌으니 온 힘을 다해 덤벼야지. 일갈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지 헛소리나 해댄다. 가라앉혀놓았던 분노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제가 무슨 상관이라고 성을 내지? 무슨 관계였든, 무슨 사이였든 스스로 끊어 내놓곤 이제 와 개입하겠다고. 강자이기 때문에 몰라도 되었고,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뭐든 제 통제 아래 있다 믿었을 테니까. 부러울 정도의 오만함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좋아했고, 그래서 미워한다.

비로소 만났다. 지그시 밟으며 이를 드러냈다. 반가움을 인정한 다음, 대화한다. 즉 싸움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의 공유를 음미할 겨를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상대를 보고 순수하게 놀란다. 지옥에 있었다 밝히며 덤벼든 기세로 드러난 한쪽 눈이 갈라져 있었다. 제게도 새겨지지 않은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쉬워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문답으로 방향을 틀자, 천둥은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조패고 싶었지만, 강한 것은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것을 느끼는데도 모르겠어서, 속에 든 것이 궁금했다. 제 발로 들어갔다 제 발로 나온 세상에 아는 얼굴이 줄어 있었을 때부터, 그전과는 견주지 못할 정도로 관심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고,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천둥은 저만치 가버렸다. 육신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떠난 지 오래였다. 자신을 담지 않는 눈에 욕지거리가 나왔다. 싸움을 멈췄다. 알고 싶어졌으니 알아야겠다. 표독스럽기까지 한 눈매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

가게를 뒤로하다 걸음을 멈췄다. 힐끗 내려다본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상대가 장갑을 끼지 않았더라면 손톱이 살을 찢었으리라 확신했다. 무시한다고 공갈이라. 이대로 발을 떼면 어찌 되려나 가늠하는데, 손가락 하나가 마구 굽어지는 느낌이 나서 마지못해 돌아본다. 저 또라이라면 부러뜨리고도 남았다.

“뭔데. 거기서 말해.”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두커니 서 있던 땡전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 드문 무표정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뭐?”

눈살을 찌푸렸다가 아예 구겼다. 의도가 불분명해 무슨 개소리냐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상한 놈. 찡그린 채로 발걸음을 옮기다, 서서히 느려진다.
저 시선. 시선의 바닥에 깔린 것이 익숙했다. 충격에 속이 뒤집혀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뭔가가 차올랐다. 구역질이라도 넘어올 성싶어 입을 벌리고 있다가, 꿀꺽 침과 함께 삼켜낸다. 어지러이 심장이 뛴다. 이해하지 말자. 시기가 어긋나 무용한 마음이었다.

고동이 어긋하니 차마 긍정적이라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미소가 나온다. 가슴이 저릿한 게 비단 저만의 통증은 아니었다. 똑똑해서 좋네. 가벼운 발소리가 건물 잔해 틈새로 스며든다.
독선적인 선포였다. 새로 관계하려 들 것이라는. 언젠가 감정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 그때는 많은 고백을 나누고 싶다고. 식량을 든 손을 가볍게 까딱였다. 아주 조지진 않아주마. 오랜만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