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땡천] 나중에 제대로 고백합니다

myeolsi 2020. 7. 20. 10:46

술, 쌍방 짝사랑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눈만 떠서 주변을 살피자 낡은 가구가 듬성히 놓여있는 방이었다. 비돌에 이런 방이 있던가. 끄응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심장 소리가 크고 어지러웠다. 땡전이 가져온 술이 달짝지근하니 맛있어서, 한두 잔 마신다는 게 병바닥을 봐버린 것은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쨌더라. 반팔 차림이 조금 춥게 느껴져서 의자에 걸쳐져 있는 겉옷을 집으러 비척비척 일어섰다가, 느려진 뇌가 시야를 못 따라오기에 벽에 몸을 기댔다. 차가운 벽을 타고 목소리가 속살댔다. 천둥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아니라 신음 소리였다. 선정적인 높낮이로 질러대기에 황급히 이마를 떼어낸다. 그리 놀라고도 술기운이 가시질 않아서 벽만 멀거니 쳐다보는데, 왼쪽 귀로 샤워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누군가가 있었다. 발을 내딛자 끼익하고 나무판자로 된 바닥이 울었다. 어렵지 않게 이 곳이 비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한 천둥은 머리를 쥐어뜯다 곧 결단을 내렸다. 최대한 조용히, 나가야 했다. 씻고 있는 게 누구든 간에 저런 옆방을 두고 어색해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핸드폰은 겉옷 주머니에 들어있고. 배트, 내 야구 배트가... 베개 옆에 널부러져있는 장갑을 쥐어 들고 배트를 찾는데,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취해서 장롱에 넣었나 싶어 덜컹 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익은 정장이 걸려있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본다.

이거 땡전 거잖아?

벌컥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늘이 자신을 버렸구나 싶다. 장롱문에 가려진 고개를 내밀었을 때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죄어오기에 천둥은 얕게 심호흡을 했다. 사실 상황 자체는 평범하지 않은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아마도 자신이 거하게 취해버려서, 버리고 가지 않을 정도의 의리는 있던 땡전이 근처 모... 숙박 시설에 데려다준 거다. 신세졌네, 고마워, 그럼 이만. 세마디 정도면 자연스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시뮬레이션을 돌린 천둥이 어색하게 웃으며 욕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렸다가, 도로 돌아왔다. 이마에 핏줄이 섰다.

"왜 벗고 있냐고!"
"씻고 나왔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바지는 입고 있잖냐. 머리를 털며 복도를 걸어온다. 속으로 아는 욕을 다 내뱉었다. 침대에 걸터앉는 땡전을 슬쩍 곁눈질했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 배트는 어딨어?"
"문가에."

예상과 흐름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제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땡전은 앞을 지나치려는 천둥의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속절없이 휘청였는데 발까지 걸어 아예 침대 위에 뒤로 넘어뜨린다. 뭔짓거린가 싶어 욕이 나오려는데, 몸 위로 상체를 겹쳐오는 땡전에 혀가 굳었다. 손목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려고?"

웃통을 벗고 있는 탓에 직시하지 못해서 놓쳤었는데, 이 녀석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했다. 취해있는 건가?

"가야, 지? 넌 아직 취한 것 같은데 좀 자다 가지 그래."

마음속으로 능청스레 말을 마친 자신을 칭찬했다. 땡전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너도 아니고."

그럼 왜 이러고 있는데!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신음 소리도 새어나가는 방음인데, 굳이 여기 사람 있소 하고 알릴 필욘 없었다. 땡전의 말로 슬쩍 고개를 든 기억이, 애초에 취한 것도 이놈 탓이라고 알렸다. 옆에서 자꾸 왜 이리 안 마시냐는 둥, 이렇게 술이 약한 녀석 처음 본다는 둥 부추겨대니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라도 꿀꺽꿀꺽 마셨었다. 또다시 빡칠 것 같아서 고갤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구슬릴까 고민하는데, 땡전이 주섬주섬 천둥의 겉옷 한쪽을 벗겨냈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올려다본다.

"...뭐하냐?"
"옷 벗기는데."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저따구로 대답한다. 땡전도 마주 웃어준다. 웃기냐 새끼야. 아까부터 계속 땡전의 페이스에 말리고 있는게 영 마음에 안들었지만, 크게 반발해서 화를 살 필욘 없었다. 하시는 대로 그냥 놔두고 있었더니, 손목을 놓고는 기어코 반대쪽까지 벗겨서 원래 걸려있던 의자로 내동댕이친다. 이게... 안에 핸드폰 들었다고 일갈하려는데 땡전의 손이 바지로 내려가서 말문이 턱 막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았다.

"너, 너, 왜. 진짜 뭐해!? 바지를 왜 벗겨!"

땡전이 그제야 고갤 들어 시선을 맞췄다. 뭐가 문제냐는 눈빛이었다. 천둥은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꿈인가? 술이 아니라 약이라도 한 걸까? 바지를 잡고 있던 손으로 땡전의 손목을 붙잡았다. 땡전이 성가시다는 듯 눈가를 작게 찌푸렸다.

"왜 벗기는지 몰라?"
"몰라 새꺄."
"이거 아주 바보는 아닌 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바보였네. 아니면 술이 덜 깨서 머리가 안 돌아가냐?"
"뭐가!"

옆방이 뭐라 생각하던 왁 고함을 질렀다. 이 미친놈은 멈추는 버튼 같은 거 없나? 술기운 때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건지 뭔지, 땡전은 손목을 잡힌 걸 개의치도 않고 손을 움직였다.

"지금 너랑 자려고 하는 거잖아."

순간 맥이 풀려서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땡전은 그 틈을 놓지지 않고 주륵 바지를 끌어 내렸다. 하반신에 차가운 공기가 여과 없이 닿아 소름이 돋았다. 한쪽 발로 천둥의 바짓단을 밟고 선 땡전이 이젠 자기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피가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미친 새끼..."
"좋아하는 사람한테 미친 새끼라니."

정정한다. 지금 당장 식었으면 좋겠다. 땡전은 여유롭게 천둥의 굳어가는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이고, 요 귀여운 거지새끼. 설명이 필요하시려나.

"야, 나 좋아하잖아. 멍청하긴, 다 티 나거든?"

확신에 차서 낄낄대자 입을 꾹 다물더니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매를 치켜뜬다. 추운 건지 불안한 건지 다리를 슬 오므린 탓에 걸쳐져 있던 바지가 아예 흘러내렸다. 땡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 몸으로 대화하고 싶게 하네 정말.

"언, 언제부터 알았는데?"

언제부터 알았냐고? 땡전은 쩝 입맛을 다셨다. 사실 자신도 오늘까지 긴가민가했기 때문이다. 이놈이 몇 시간 전에 훌쩍거리면서 술술 불기 전까진.

"네가 술 마시고 고백했거든."
"...이런 씨발..."

당장에 혼절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혈색이 어두워져서, 땡전은 텀을 길게 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임마. 그래서 우리 사귀기로 했다고."
"그래, 앞으론 돈 받을 때 점보만... 뭐?"

방금 말을 끝까지 들으랬는데, 진짜 말 안 듣는 새끼였다. 그래도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보는 건 꽤 재미있었기에 굳이 짚지 않고 넘어간다. 황망한 눈과 다르게 아주 미미하게 올라간 천둥의 입끝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됐지?"
"뭐가... 아니! 아니 잠깐만!"

천둥은 땡전을 말리면서도 기다려 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땡전도 그 예상에 부응해 냅다 입을 맞췄다. 놀라서 뻣뻣해진 천둥의 척추를 손으로 지분거리며 내려간다. 흠칫대며 자신을 막으려고 등 뒤로 손을 가져오는 걸 깍지를 껴 고정하곤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라니? 안 될 말이었다.

이 잡부 놈은 대화라는 도구를 모르는 듯했다. 어차피 합의된 관계라면 좀, 마음의 준비라던가, 적어도 씻을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는가. 지만 깨끗하면 되는 줄 아나! 열이 뻗쳐서 입안으로 들어오는 살덩이를 콱 물어버릴까 고민하는데 아까 의문을 띄워놓은 뇌가 드디어 일을 한 모양인지, 별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땡전에 혀끝에선 술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이 자식의 얼굴이 빨갰던 건 욕실의 더운 공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은 붉은 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아니 근데, 길다고. 길어! 담배 피우는 주제에 폐활량이 괴물이어서, 결국 천둥이 먼저 고갤 비틀어 빠져나왔다. 작은 기침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한참을 오갔다. 땡전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늘 끝까지 갈 거다. 각오해둬."

허세부리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은 천둥은 목덜미에 이를 묻는 땡전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긴 밤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