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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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eolsi 2020. 6. 16. 19:45

여름엔 바다지. 화이트가 수박을 베어물며 말했을 때,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멀거니 화이트를 쳐다보자 이내 시선이 마주 꽂힌다.

"세인은 어떤 바다가 좋아? 난 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바다."
"어... 가본 적 없어요."

화이트가 입을 헤 벌렸다가, 그 자리에 수박을 끼워 넣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진지한 표정을 한다.

"지금 몇 시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지. 기대가 섞인 한숨을 내쉰다.



정확히 1시간 30분 후, 나는 바다를 눈앞에 했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뒤따라오겠다는 올렌이 없는 게 아쉬웠다. 자신을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난생처음 바다를 보는 순간에 셋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불현듯 든 생각일 뿐이었다. '첫 바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면 후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혹은 '셋'이나.
하지만 생각을 멈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서는.

"어때?"

나를 안고 날아온 탓에 본래의 모습인 화이트가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절벽에 걸터앉아있는데도 자신보다 눈높이가 높았다.
어떠냐, 고. 상념을 떨쳐내고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았다. 거대한 물이었다. 푸른색이라기보단 연두색에 가깝다. 맑아서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끊임없이 파도가 쳤다. 높게 솟은 태양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평선. 그 단어를 이해한다. 땅과 바다엔 끝이 있었다.

"바다... 예쁘네요."
"맞아. 더 다가가 볼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화이트가 내 허리를 잡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내장을 절벽 위에 둔채 몸만 떨어지는, 절로 숨을 참게 되는 감각이 발끝까지 찌르르 퍼졌다.
중력의 작용에 의한 충격에 (마음속으로나마)대비했으나, 화이트는 모래도 튀지않을 정도로 사뿐히 내려섰다. 바람에 모래가 흩날릴뿐이었다. 반쯤 혼이 나간 사람의 표정이 그리도 재미있으신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내려놓는다.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꼭 잡고 있던 화이트의 옷자락을 놓고 비틀비틀 모래사장을 나아갔다. 바다에서 신발은 필요하지 않다는 화이트의 말을 듣고 집에서부터 맨발이었다. 옳은 조언이었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와 완벽한 발자국을 만들어내는 고운 모래들이 신발에 자리잡는다면, 쫓아내는 일은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할 터였다. 뜨뜻하니 잘 마른 상아빛 모래를 지나 바다에 닿아 어두워진 모래를 밟았다. 곧 파도가 발을 감쌌다. 시원하다 못해 조금 차가운 바닷물이 발등을 휘감았다. 세발자국 더 다가가 바다에 다리를 담갔다. 허리를 숙여 종아리에서 넘실거리는 바다를 만져보는 동안 평소처럼 키를 줄인 화이트가 찰박찰박 다가왔다. 물이라도 튀기려들지 않을까 조금 긴장했으나 웬일로 얌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빛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어때?"

뭘 자꾸 어떻냐는 걸까. 대답이 궁해서, 몸을 돌려 바다를 걸었다. 바다는 생각보다 힘이 셌다. 조금씩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참방거리는 소리가 뒤편에서도 들려와서 화이트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슬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무언인 채로 바다를 헤매다 재리쬐는 햇빛에 지쳐 적당한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았다. 화이트도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느 틈에 주운 건지 조개껍질을 몇 개 슥 건낸다. 책에서 본 것처럼 귀에 소라고둥을 대보자 희미한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화이트가 모랫바닥에 펼쳐놓은 조개껍질 하나를 가져가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발로 기어본 적 있어?"
"네?"

황당해서 바로 맞받아친다. 잘 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지, 화이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파도 소리가 크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잘 못 들을 리가 없는데도.

"네발로..."
"아뇨, 아뇨. 없어요."
"흐음."
"..."
"..."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이사이로 모래가 뭉개진다. 작은 알갱이가 붙어 남아있었다. 따뜻한 바닷바람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럼,"
"아뇨."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올려다보지 않아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 울상지은 표정을 보고 웃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 내가 미소 짓는다면 또다시 그런, 괴상한 제안을 해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말을 몇 번이고 며칠이고 곱씹어보다가, 한번 해볼까, 해버리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잊고 있다가 몇 달 뒤에 갑작스레 떠올릴 수도 있었고. 그럴 여유가 있었다. 화이트와 함께 있으면. 그가 나를 그렇게 해줬다.

"됐어요."

언제든 할 수 있었다.